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짜내 그저 그렇지만은 않은 아이디어를 내고 생고생을 하며 취재를 했건만, 기사는 1개면에서 7장으로 줄었다. 한 사람의 정치적 편향성, 사안을 보는 편협한 관점, 아집이 크게 작용했다. 또 별로 개의치 않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분들의 그저그렇게 흘러가는 듯한 생각도 큰 역할을 했다. 결국은 작은 발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격적으로 발제하라고? 누구도 보도하지 않았던 팩트를 가져오라고? 부장은 끊임없이 킬해도 너희는 젊으니깐 그러면 안된다고? 지랄 염병이다.

그럼 그렇게 하면 제대로 실을 자신은 있고? 대구로 내려가고 싶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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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번의 4월 16일이 지났을 뿐입니다. 아들을 떠나 보내고 우리의 시간과 달력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안산 단원고 2학년 8반 고(故) 장준영군의 아버지 장훈씨)

 “우리는 구조된 게 아니다. 스스로 탈출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나. 그건 세월호에서 살아나온 것.”(세월호 생존 단원고 학생 장예진씨)

 지난 7일 새해 첫 촛불집회에서 서울 광화문광장 무대에 오른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학생들의 발언에 집회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눈물을 훔치거나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사회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세월호 참사를 두고 “작년이냐 재작년이냐”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구속하라”, “퇴진하라”고 외치는 시민들도 있었다.

 9일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1000일째 되는 날이다. 국민들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잊지 못하는, 잊지 않아야 할 일이 됐다. 서울신문은 세월호 참사 1000일을 맞아 지난 7일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 76명에게 세월호의 의미를 물어봤다. 인터뷰는 ‘세월호는 ㅇㅇㅇ이다’라고 묻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민들의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 ‘잊지 않다’(33회), ‘기억’(15회), ‘우리’(14회), ‘참사’(12회), ‘국가·대한민국’(10회), ‘눈물’(9회), ‘진실·아픔’(8회), ‘민낯’(7회) 등의 단어가 주로 언급됐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억’이라는 단어는 절실함의 표현으로 해석된다”며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재홍 경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에 ‘국가’라는 단어는 좌절감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일’이고, 아픈 기억이자 슬픈 현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직장인 김정애(49·여)씨는 “세월호는 기억”이라면서 “잊지 않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을 보수 지지자라고 밝힌 이광웅(67)씨는 “손주보기 부끄러운 세상. 잊지말자 세월호”이라고 적으면서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중학생 한혜림(16·여)양은 세월호를 ‘그림자’라고 봤다. 한양은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고,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회사원 김동관(50)씨는 “우리 모두의 눈물이다”라고 적은 뒤 “슬프니까”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 외에도 “불쌍한 아이들 절대 못 잊는다”, “잊지않을 잊지못할 우리의 진실”, “언제 떠올려도 아픈 머리속 가시”, “자식잃은 아픈 자리”, “언니 오빠들의 희망을 앗아갔다”, “잊지 못할 우리의 일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등의 대답이 나왔다.

 국민들은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거나 진상규명과 인양이 더디게 진행되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국가 시스템의 부재와 부패하고 부능한 권력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직장인 김정교(50·여)씨는 “국가가 더 이상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을 알게 해준 국민의 눈물”이라고 했다. 대학원생 박찬종(31)씨는 “설령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국가 시스템에 의해 구조됐어야 할 아이들”이라면서 “국가 시스템의 부재가 만들어낸 잊지 않아야 할 참사”라고 적었다. 대학생 김지예(26·여)씨는 “세월호는 떠올라야 한다”라면서 “세월호의 진실이 다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해 이렇게 적었다”고 말했다. 두 딸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이철환(44)씨는 “이제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 주세요”라고 적으면서 조속한 인양을 요구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변하지 않는 세상,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정치나 사회 이슈를 외면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아파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스케치북에 “우리의 침몰한 양심”이라고 적던 김건희(43)씨는 “너무나 아픈 기억”이라며 이유를 설명하면서 울먹이기도 했다. 자영업자 김주영(55)씨는 세월호를 “어른들의 민낯”이라고 정의했다. 김씨는 “나와 같은 50대가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고 말했다. 주부 곽인정(31·여)씨는 “어른들의 눈물”이라고 적은 뒤 “아이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무능한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설명했다. 직장인 김지연(40·여)씨도 “그날의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며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부모들의 눈물”이라고 적어 내려갔다. 이 외에도 “양심의 소리”, “국가 실종의 상징”, “그날, 대한민국도 침몰했다”, “교통사고가 아니다”, “가라앉은 진실”, “대한민국의 부조리 그 자체”, “얼룩진 우리의 거울” 등의 대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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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인 소방관 처우개선 관련 기사. 연말을 맞아 다시 아버님을 만났다. 간만에 심혈을 기울여 쓴 기사라 원본이 너무 아까워서. 여기에 라도 또 올리면서 스스로를 위로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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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곧 죽을텐데 아버지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갈 수가 없잖아요.”

 항암치료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지만 차마 이 말을 아버지에게 직접할 수 없었다. 며느리를 통해 전해들은 이 말은 아직도 김정남(68)씨의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다. 31살의 젊은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낸 아버지는 여전히 국가가 원망스럽고, 소방관이 되겠다던 아들을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5개월 만에 다시 만난 정남씨는 인터뷰 내내 “아들 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5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정남씨는 인터뷰 중간중간 눈물을 훔쳤다. 정남씨의 아들인 고 김범석 소방관은 2014년 6월 숨을 거뒀다. 김 소방관은 2006년 소방공무원에 임용된 뒤 8년간 1021차례나 화재·구조 현장을 누볐다. 2013년 8월 훈련 중 고열 및 호흡곤란 증세를 갑자기 호소했고, 3개월 후 혈관육종암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 정남씨는 아들이 남기고 간 미래일기를 다시 꺼내봤다고 했다. 김 소방관이 투병 생활 중에 ‘병이 낫는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써내려간 메모에는 2016년 12월 어느날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아들과 캠핑을 다녀왔다. 아픈 몸 때문에 하지 못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 예전처럼 돌아가야겠다.”, “다음달 동계수난구조훈련 준비로 바쁘다. 대원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줘 구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죽기 전날 며느리를 붙잡고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했던 아들은 손자와 캠핑 한 번 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사놓은 캠핑장비는 집 한켠에 놓여있다. 그런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주지 않는 국가를 상대로 정남씨는 소송전을 벌여야만 했다. “병 걸린 아빠가 아닌 자랑스러운 소방관 아빠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유언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정남씨는 “당연히 소방관 일을 하다 얻은 질병으로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올해 3월 재심의 요청마저 기각되자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법정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정남씨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본 해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서울신문 보도<2016년 7월 5일자>로 아들의 사연이 알려진 후 여러 단체 등에서 ‘소송비에 보태고 싶다’며 도움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그 분들을 도와달라”는게 이유였다.

 올해는 왕복 6시간이 걸리는 부산과 서울을 유난히 자주 오갔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관련법 개정 논의가 일면서 정남씨는 각종 토론회나 공청회 등에 참여해 소송의 어려움, 현행법의 부당함 등을 설명했다. 정남씨는 “무조건 공무상 사망을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며 “유가족에게 업무연관성 입증 책임을 미루고, 국가를 위해 일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소송까지 해야하는 현행법을 개선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소망을 묻자 “판결과는 상관없이 아들의 이름이 붙은 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이라며 “다른 소방관들의 처우가 개선되다면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 김범석 소방관법(위험직무 공무원의 순직 및 공상 인정에 관한 법률) 발의안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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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만으로 5년차, 하지만 기사는 쓰면 쓸수록 모르겠다.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스타일은 있는 건 알겠지만. 그 이상은 머가 좋은 기사인지 어떤 식이 맞는건지, 전형적이지 않은 형태는 맞지 않는것인지. 상보는 꼭 시간순으로, 또 전형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어렵다. 휴우..


나름 최선을 다해 쓴 기사라, 이대로 세상 속으로 사라지긴 아깝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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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만 국민이 거리로 뛰어나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명령했다. 궂은 날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26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는 150만 개의 촛불(주최측 추산·경찰 추산 27만)이 청와대를 에워싸고 “박 대통령은 물러나라”라고 외쳤다. 서울을 제외한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40만 촛불(주최측 추산·경찰 추산 6만)이 타올랐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와 반복되는 집회로 인한 피로감 등으로 촛불의 기세가 한풀 꺾일 것이라는 전망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시민들은 눈과 비를 뚫고 두꺼운 패딩과 목도리, 장갑 등으로 중무장한 채 또다시 광장에 모였다. 역대 최대 규모인 150만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집결해 촛불을 켰고,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다. 시민들은 촛불로 추운 날씨를 이겨냈고, 폭력시위 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와 편견을 무력화시켰다.

 이날 영하 0.7도까지 떨어진 쌀쌀한 날씨에도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을 높이 들고 대통령 즉각 퇴진을 촉구했다. 서울에 올해 첫눈이 내린 이날 낮 최고기온도 영상 3도에 불과했다. 이번 집회에 앞서 쌀쌀해진 날씨와 눈·비 소식에 가족단위 참가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이날 오후 6시 기준 80만명의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모였다. 다섯차례 진행된 촛불집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간에 많은 인원이 모인 셈이다. 오후 8시 기준으로 150만명을 넘어서면서 지난 12일 100만명이 참가하면서 세운 ‘역대 최대 규모 집회’의 기록도 갈아치웠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두꺼운 패딩 등 방한복을 입었고, 목도리와 장갑, 마스크를 착용했다. 여성들은 어그 부츠를, 남성들은 등산화를 신은 경우가 많았다. 장갑을 낀 손에는 양초 촛불이나 LED 촛불이 빠짐없이 들려있었다. 비옷과 방석, 핫팩 등을 파는 상인들도 늘었다. 집회 현장 인근 편의점은 핫팩과 뜨거운 캔 커피를 구매하려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조미희(44·여)씨는 “오후 2시쯤 도착해서 내리는 눈을 다 맞고 있었지만 몸보다 마음이 더 춥다”고 전했다. 김모(51)씨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 관계자들은 춥다고 촛불이 줄어드는 것을 바랄 것 아닌가”라며 “국민들을 추위에 떨도록 내몰고 따뜻한 곳에 앉아 있는 것은 대통령의 자세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4시 시민들은 청운동 주민센터,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세움 아트스페이스로 행진해 청와대 턱 밑에서 “박근혜는 물러나라”고 외쳤지만, 큰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서쪽의 청운동 주민센터에서부터 청와대까지의 직선 거리는 200m에 불과하다. 본 집회 이후인 오후 8시부터 진행된 2차 행진 때도 통의로터리와 정부종합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시민과 경찰이 대치했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대신 집회 참가자들과 광장에 나가지 못한 국민들은 오후 8시부터 촛불과 집의 전등을 끄는 ‘1분 소등’ 행사로 고요하고도 엄중하게 대통령 하야를 촉구했다. 반복되는 집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한 분노가 자칫 폭력 사태를 불러올 것이라는 전망도 빗나간 셈이다.

 아들(14)과 함께 통의로터리 가장 앞쪽에서 퇴진 구호를 외치던 박정현(47)씨는 “바로 앞에 경찰 차벽이 보이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온 국민이 대통령 하야를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이 폭력이나 경찰을 뚫고 청와대로 진격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김희성(45)씨는 “집회에 참가한 국민들은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집회로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며 “더 이상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말했다.

 다만 오후 6시 경찰이 경복궁 앞 율곡로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시민들이 들어서지 못하게 차벽을 설치하면서 100여명의 시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경찰 관계자는 “집회에 참석한 시민 가운데 북악산을 넘어 청와대로 가려다 검거된 시민단체 회원 외에 집회 도중 연행된 시민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퇴진이라는 국민들의 열망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폭력사태, 반복되는 집회에 대한 피로감, 집회 인원 감소 등 모든 편견과 우려를 불식시켰다고 진단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정치적 성향과 지역을 떠나 모든 국민들이 하나의 목표를 외치면서 광장에 모였다”며 “그만큼 많은 국민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비폭력 평화집회로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12일 100만명이 모이면서 이미 국민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제대로 된 조치가 없으니 이번 집회 인원이 더 늘어난 것이고, 평화집회의 끝을 보여줬다”며 “집회 이후 청와대가 불통으로 일관한다면 어떤 식으로 분노가 표출될 지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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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못다쓴 이야기 2016. 9. 29. 03:17
대리.
회사의 김대리가 아닌 대리운전기사를 언젠가부터 그냥 대리라고 부르고 있다. 누군가의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들. 대가로 손에 쥐는 만원 혹은 그것보다 조금 많은 금액.
전부터 취재하고 싶었던 주제였기에 어쩌면 갑작스런 지시에도 흔쾌히 가겠노라 한거같다. 물론 뼛속 깊은 노예근성때문에 안 간다고는 못했겠지만.

김영란법 때문에 타격이 있지않냐는 질문은 부끄러웠다. 거지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이랬다.

그들만의 리그야..그법은.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 힘쎈사람들 힘 못쓰게 하자는 법에 왜 피해는 우리가 입어야 하냐는거지. 반대로 생각해봐. 기자양반. 오늘 당장 콜이 줄었어. 그만큼 비정상적인 접대술자리가 많았다는거잖아. 우리도 그 기이한 구조에서 빌붙어 돈을 벌었던 것이고. 근데말이야. 우린 잘못한게 없어. 그냥 남 대신해서 운전만 한거잖아. 근데 왜 우리목구녕을 걱정해야되냐는거지. 경기가 안좋아도 세월호가 가라앉아도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정작 목구녕이 포도청이 될 사람들은 다 잘 살잖아. 그러니깐 애시당초 이런일을 하게 된 내 탓인거지. 그 김영란인가 하는 법 당장은 돈벌이 줄어들어도 잘됐으면 좋겠어. 그래도 좋은 법이잖아.

목구녕이 포도청인 기사분은 한때 법조계에 종사했다고 했다. 인권변호사 비슷한 양반을 모시다 장사가 안돼 팔년 전에 사무실을 접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았다. 낮에는 어느 회장님 차를 밤에는 이름모를 사람의 차를 몬다. 본인 소유의 차는 없다. 갚아야할 빚이 많아서다.

새벽 세시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귀가하는 대리기사분들을 보면서 세상엔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도 나름 열심히 산다. 생각이 많아지는 새벽이다. 나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걸까. 이분들은 어떤 세상을 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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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705009008


올해 들어 쓴 기사 중 가장 자랑하고픈 기사. 아니 아마 지금까지 기자생활동안 가장 보람있는 기사가 아니였나라는 생각. 


내가 소방관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 국민안전처를 출입하면서 마주하게 된 그들의 실상때문일꺼다. 그리고 화재 재난 현장에서 망설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봐서일까. 소방조직에도 수많은 비리가 있고, 물론 현장 출동을 하지 않고 노는 이른바 땡보직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현장에 돌아가면 망설임없이 뛰어든다. 


그런 그들이 받는 대우는 너무나 비참하다.


원래 기사는 이렇게 비루했다. 데스킹을 거쳐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죽고나면 ‘그래 고생했다’고 인정받고 싶어. 내 병이 이래서 (순직으로) 인정받기 힘든 거 알아. 그래도 내가 죽고나면 소송이라도 해줘. 우리 아들에게 병에 걸린 아빠가 아닌 자랑스런 소방관 아빠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김범석(당시 31세) 소방관은 혈관육종암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지 7개월 만인 2014년 6월 아내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혈관의 세포에서 암이 발생하는 혈관육종암은 의학적으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이다. 김 소방관이 죽고난 뒤 2년이 지났지만 그의 아내는 “앞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8년동안 화재·재난 현장에서 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던 남편이었지만, 국가는 남편의 죽음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아내는 “화재 현장에서 죽지 않는 이상 업무연관성을 입증하기가 힘들어 순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며 “포기하면 그만인데 남편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려 소송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지난해 유가족이 ‘순직을 인정해달라’며 제기한 유족보상금 청구를 기각했다. 공단의 결정문에는 “공무 수행 중 질병이 새롭게 발병했거나 급격히 악화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해당 질병의 원인이 화재현장 등에서 노출되는 유독성 물질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없고, 감염경로도 명확하지 않다”고 적혀있다. 공단은 지난 3월 유가족의 재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족들은 현재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2006년 소방공무원에 임용된 김 소방관은 부산 남부소방서 119구조대, 중앙119구조본부 등에서 근무했다. 화재 출동 270차례, 구조 활동 751차례 등 모두 1000차례에 걸쳐 구조 현장을 누볐다. 불길을 뚫고 들어가 사람을 구하고, 강이나 호수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사체를 수습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동료들은 그를 ‘구조 머신’이라고 불렀다. 뛰어난 체력으로 누구보다 먼저 구조에 나서 가장 늦게까지 현장을 지켰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인체에 유해한 오염물질도 섞여 있었지만, 그는 다른 소방관과 마찬가지로 눈 앞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다.

 한정민 소방관은 “실력이나 체력 면에서 어느 하나 뒤쳐지는 게 없었던 최고의 구조대원”이라면서 “어떤 유해한 물질이 있을지 모르는 화재현장에 출동하고, 독성가스를 그대로 마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소방관은 화재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 염화수소 등 10여종이 넘는 화학적 유해물질에 노출된다. 박민식 소방관은 “병을 얻기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할 정도로 건강했다”고 전했다. 동료들은 공단의 재심의 과정에서 순직을 인정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유난히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마라톤, 자전거, 수영 등을 각종 운동을 섭렵했으며, 담배는 물론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은 뒤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무거운 장비를 들었던 팔은 가늘어졌고, 항암치료로 머리카락도 모두 빠졌다. 하지만 7개월간의 투병생활동안 그는 소방관이었던 걸 후회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소방제복을 입고 싶다고 할 때 말렸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주지 않는 국가가 원망스럽다. 아버지는 청와대, 공무원연금공단에 탄원서를 냈지만 어떤 답변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는 “길거리에 지나가는 소방차만 봐도 아들 생각이 난다”며 “소송을 하면서 우리 아들만이 아니라 많은 소방관이 겪고 있는 문제하는 걸 알게 됐다. 아들의 사연이 알려지면 윗분들이 조금이라도 소방관들의 처지에 관심을 가져 주지 않겠냐”고 했다.


+넣지 못해서 아까웠던 부분

 “죽기 전날 저를 붙잡고 살고 싶다고,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했어요. 아들과 함께 목욕탕도 가고 싶고, 캠핑도 가고 싶다고. 진짜 잘할 자신이 있었다면서.”

 고(故) 김범석 소방관의 아내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똑 부러지게 인터뷰하던 아내는 투병 중이던 남편이 쓴 메모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군다. 김 소방관이 투병 중에 ‘병이 낫는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써내려간 미래일기라는 제목의 메모에는 2016년 12월 어느날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아들과 캠핑을 다녀왔다. 아픈 몸 때문에 하지 못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 예전처럼 돌아가야겠다.”, “다음달 동계수난구조훈련 준비로 바쁘다. 대원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줘 구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는 아들과의 캠핑도 동계수난구조훈련도 하지 못한 채 2014년 6월 혈관육종암으로 숨을 거뒀다. 남편이 죽고난 뒤 2년이 지났지만 아내는 “앞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8년동안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던 남편이었지만, 국가는 남편의 죽음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혈관육종암은 의학적으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병에 걸린 이유가 소방관 업무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게 공무원연금공단이 내세우는 이유다. 아내는 “화재 현장에서 죽지 않는 이상 업무연관성을 입증하기가 힘들어 순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며 “포기하면 그만인데 남편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려 소송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만에 다시 쓴 기사, 안타까운 소식

 “그는 강인한 체력으로 솔선수범하던 소방관이었습니다. 유독물질이 퍼져 있는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 가장 늦게 나왔죠. 그 결과가 혈액암에 걸린 거였고, 공무상 부상(공상)을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4일 혈액암으로 사망한 부산소방본부 이성찬(47) 소방관의 후배인 오현민(33) 소방관은 “그저 소방관으로 일하다가 이런 병을 얻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5년 부산시 소방공무원으로 임용된 이 소방관은 18년간 733차례나 현장에 출동해 화재진압·구조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동래소방서에서 근무하던 2013년 11월 혈액암(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고, 치료를 위해 퇴직했다. 골수에서 항체를 생산하는 백혈구(형질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병으로 의학계는 방사선, 중금속, 살충제 등 화학물질의 노출을 원인으로 추정한다. 2010년 건강검진에서 특이사항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이 소방관의 입장에서 충격은 컸다.

 그는 이후 2년 8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며 2억여원의 치료비를 지출했다. 이 소방관은 2015년 3월 공무원연금공단에 공상 신청을 냈지만 “혈액암과 소방업무의 연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재심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11월 행정법원에 ‘공단의 공상 불인정 처분이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이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의 소송을 계속할 예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소방관의 동료는 “성찬이는 항상 ‘동료, 후배 소방관들이 같은 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소송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며 “그 뜻이 조금이라도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려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실이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 동안 암에 걸린 소방관이 공상을 인정받은 경우는 전체 18명 가운데 단 1명(5.6%) 뿐이었다. 외상을 포함한 전체 질병 중 공무상 사망이 인정된 경우가 63건 가운데 45건(71.4%)인 점을 감안하면 인정 비율이 너무 낮은 셈이다. 

 문제는 공단이 아니라 소방관 개인이 업무와 질병의 연관성을 인정해야 하는 점이다. 이는 암·희귀병과 업무상 관계를 규명한 학문적 결과물이 없는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는 게 소방관들의 하소연이다. 미국의 경우 ‘소방 업무가 암 발생 등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보고서 등을 기반으로 암·고혈압·심근경색·호흡기 질환 등의 질병에 대해 가족병력·근무기간 조건이 충족되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

 표 의원은 이달 말쯤 ‘소방관 공·사상 인정범위 확대를 위한 특례법(일명 김범석법)’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김범석 소방관은 2014년 6월 혈관육종암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사망했으며 그의 유족은 ‘공무상 사망’ 인정을 받기 위해 현재 공단과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다.(서울신문 2016년 7월 5일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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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TheSeoulShinmun/videos/829861187114907/


원래는 이런걸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입사 후 5년 만에 뒤늦은 꿈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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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에 허언증 갤러리가 생겼다는 한 선배의 제보와 이걸 기사로 써보면 어떻겠댜는 제안 덕분에 기사를 준비했고, 취재하는 도중에 어쩌면 나도 허언증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 허언증이 있지 않을까. 

기사에는 분량 관계로 녹이지 못했지만,, 허언증을 앓는 환자들은 VAK 감각검사를 하면 대부분 시각이 매우 발달한 것으로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보이는 면에 집착하다보니 자신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것이다. 우리는 참 어려운 나라에서 어려운 현실을 살아내는 것 같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81&aid=0002686069&sid1=001


이건 데스킹을 보기 전 기사. 아무래도 데스킹을 거친 말끔한 기사보다는 투박하고 기승전결도 논리도 엉망이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생각했던 내용을 그대로 다 녹이고 구성됐다는 면에는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객관적으로 보면 누가봐도 데스킹을 거친 기사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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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노벨수학상 수상했는데 9급 공무원시험 가산점 있나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허언증 갤러리에는 매일 500여건 이상의 게시물이 올라온다. 원빈, 장동건 등 유명인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본인 인증’을 하기도 하고, ‘자산이 2000억’이라거나 ‘정규직 면접에 합격했다’는 글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초라한 현실보다 화려한 거짓을 추구하는 허언증 열풍은 흙수저, 금수저 등 수저계급론 등과 맞물리면서 하나의 놀이문화가 될 정도로 일상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허언증은 병적인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공상허언증(리플리 증후군), 관심을 끌기 위한 꾀병 등으로 동정을 이끌어내는 뭔하우젠 증후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 허구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작화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7년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사건, 지난해 미국 명문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를 동시에 합격했다던 한인 수학 천재 소녀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허언증 열풍은 단순한 정신질환적 문제가 아닌 사회병리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허언증은 자기애적 인격장애, 망상장애(과대 망상)를 앓는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 가운데 하나”라면서 “최근 외모, 직장, 학력 등 외적인 면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심리가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최고야 심리상담소장은 “반복되는 거짓말 등 허언증 관련 상담은 2~3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고 전했다. 최 소장은 “상담을 진행해보면 허언증 환자들은 외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고, 가족 등 주위의 기대감에 시달린 20~30대가 대부분”이라며 “허위 자격증 작성, 재직증명서 조작 등을 통해 거짓말을 사실처럼 믿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허언증은 꾸준한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의 거짓말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치료 의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을 사칭해 SNS를 운영하는 것부터 시작해 공무원이나 법조인을 사칭해 금품갈취나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등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이유기도 하다.

 직장인 박모(28)씨는 지난달 다른 사람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사진이 도용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박씨의 사진과 함께 ‘내 남자친구, 직업은 의사’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해당 여성은 이른바 잘 나가는 남자친구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 비교적 준수한 외모인 박씨의 사진을 도용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지난해 11월 시행한 개인정보보호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인터넷 이용자 10명 가운데 3명(30.1%)이 인적사항, 자신이 언급되는 글, 사진 등 개인정보 침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월에는 30대 여성이 길에서 주운 여대생의 신분증을 이용해 음대생 행세하고 다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평소 동경하던 음대생의 삶을 살고 싶었다는 게 범행 동기였다. 또 지난해 10월 서울 강남 일대에서 청와대 직속 국가비밀자금 관리 기관을 사칭하면서 수십억원대 사기를 친 일당 가운데 한 명도 리플리 증후군으로 조사됐다. 안모(44·여)씨는 모델, 일본 연예인 등 미모의 여성 사진을 프로필로 내걸고 재무 전문가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돈을 뜯어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허언증으로 인한 단순 사칭은 개인정보 보호, 변호사법 위반, 공무원사칭 등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며 “범죄를 저지르는 당사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만큼 금품갈취 등으로 이어지면 단순 사기범죄보다 많은 피해자가 양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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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이자 신학대학 교수인 아버지가 자신의 막내딸을 때려 숨지게 한뒤 집 안에 시신을 방치한 사건. 설 연휴 전 벌어진 이 사건으로 한동안 부천으로 출근을 하게 됐었다. 지난번 부천 초등학생 시신 훼손 및 유기사건 이후 두 번째로 취재했던 아동학대, 살인 사건. 취재하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디까지 취재해야할 것인가, 어디까지 기사를 써야할 것인가.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 어떻게 취재해야 하나.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속을 맴돌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작은 팩트 하나에 집착하면서 취재가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만 보였다. 다음에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될 것이지만, 혹시나 또 이런 사건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된다면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으면.. 많은 시간이 지났고, 목사 아버지는 재판에 넘겨졌다. 그리고 우리는 또 이런 사건을 잊은 채 살아갈 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런 아이들이 없길 바라며...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204009012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204009010

두 얼굴의 목사.


그리고, 설 연휴 바로 전날 있었던 현장검증. 여중생이 사망해 11개월 가량 방치됐던 목사의 집 앞 현관문에는 누군가 가져다놓은 국화꽃이 있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206008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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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 30분까지 나는 신림역 일대에서 학대나 가정폭력을 이유로 가출한 청소년을 찾고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충남 아산 출신 유학생을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운 좋게도 카페 흡연실에 들어온 아이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비록 기사에는 모든 부분이 나가지는 못했지만.. 투박하지만 간만에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아까워서 여기다 올려본다.

어쩌다보니..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메인에 걸리면서 가장 많이 읽은 뉴스가 됐다.. 이런 심리적 보상감에 만족해선.. 이 짓을 그만둘 수가 없는데.. 큰일이다. 나약해서.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81&aid=0002669308&date=20160121&type=1&rankingSeq=8&rankingSection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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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감온도가 영하 22도를 기록한 지난 19일. 살을 에는 추위에도 거리의 아이들은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일대를 방황하고 있었다. 체육복 바지에 삼선 슬리퍼, 담배에 눌린 자국이 선명한 패딩은 이번 겨울 가장 심하다는 추위를 막기에는 턱없이 얇아 보였다.

 “아저씨, 쇠파이프로 존나 맞아봤어요?”

 오후 4시쯤 신림역 인근의 카페 흡연실에서 만난 최성원(15·가명)군은 가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꾸했다. 최군을 비롯해 5명의 아이들은 카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2층에 마련된 흡연실로 직행했다. 음료는 주문하지 않았다. 최군은 “밥 먹을 돈도 없는데 무슨 커피에요. 여긴 그냥 시간 때우러 오는 곳”이라면서 “담배도 마음 놓고 피고, 춥지도 않아요”라고 말했다. 흡연실 한구석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한참을 담배만 피워대던 아이들은 “우리도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바깥에 있기 싫어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5명 가운데 가출한 아이는 모두 3명. 아이들은 부모의 폭력이나 방임에 지쳐 거리로 나왔다. 한 달 전 집을 나온 김희권(15·가명)군은 “아빠는 이혼한 뒤부터 나를 보면 ‘저건 인간이 안된다’며 수시로 때렸다”고 전했다. 박일원(15·가명)군은 맞벌이하는 부모의 무관심에 지쳐 거리로 나섰다. 박군은 “공부를 못해서인지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내가 집을 나간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 집을 나온지 가장 오래된 최군은 가출 이후 6개월동안의 생활이 만족스럽다. 최군은 “아빠라는 사람은 주먹으로 때리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쇠파이프를 휘두르기도 했다. 맞는 게 너무 싫었다. 날씨는 춥지만 밖에 나와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게 더 좋다”고 전했다. 최군 일행은 2시간 정도 카페 흡연실에만 있다가 PC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10시가 되면 PC방과 노래방은 들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은 밤 늦은 시간부터는 주로 24시간 운영되는 카페에 자리잡는다. 오후 11시쯤 “시발, 존나 춥네”를 연발하며 흡연실로 들어온 손정환(17·가명)군은 비슷한 처지의 형들과 함께 원룸을 얻어 살고 있다. 가출한 지 1년 이상이 지났다는 아이들은 배달대행업체, 식당, 카페 등에서 주로 일한다고 했다. 손군은 “몇일 만에 그만두거나 짤리는 경우가 많아요. 돈이 다 떨어지면 여자애들은 조건을 뛰고, 남자애들은 삥을 뜯거나 업소 같은 곳에서 일하죠”하고 말했다. 가출한 이유에 대해 묻자 “엄마 아빠한테 맞는 게 싫어서 나왔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가출 청소년 가운데 61.3%가 가족과의 갈등이나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해 집을 뛰쳐나왔다. 최은영 금천청소년쉼터 팀장은 “절반 이상은 가정폭력을 피해 나온 아이들”이라면서 “가정폭력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은 절대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내 자식을 내가 때리는 데 무슨 상관이냐’는 부모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담이나 교육은 어렵다. 아이들이 집을 나오는 이유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학대와 폭력에 떠밀려 거리로 나온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에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또다시 맞으면서 살기가 싫어서다. 맞지 않는다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아이들 대부분은 “그럴리가 없다(때리지 않을리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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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역시나 발제가 없었던 날. 28일 이뤄진 한일 양국간의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이후 외교부 차관들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온다는 소식에 현장으로 향했다. 대학 때 잠시 대구에 있는 정신대문제대책 관련 시민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한 기억이 났다. 말이 봉사활동이지 할머니들이랑 같이 노는 거였다.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을 때라 할머니들의 아픔이나 고통,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할매랑 같이 노는 손자 정도였을 꺼다. 길게는 하지 못한 봉사활동이 끝나고 나는 할매들의 존재는 잊고 살았다.

선배의 지시를 받고 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쉼터 거실에는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89), 이용수(88), 길원옥(87) 할머니가 나란히 앉았다. 화가 많이 나셨다. 노구를 이끌고 집으로 들이닥친 취재진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집으로 들어설 외교부 차관때문일지도 모른다. 차관이 오고난뒤 내용은 이미 알려진대로다. 할매들은 "어느나라 소속이냐, 일본이랑 짝짜꿍하냐"등 강한 발언을 쏟아냈다. 분노하고 원통했을 할매들의 목소리가 집 밖으로 까지 흘러나왔다.( 참고로 인터넷에 찾아보면 할매들과 차관의 대화 내용 전문을 볼 수 있다)

쓰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원본기사는 이렇게 나갔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123000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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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임 차관과의 대화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다가 이제와서 정부 마음대로 했다”며 “(기자들도)사진만 찍어가지 마시고, 우리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달라”고 호소했다.

할머니는 거센 경상도 사투리로 차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타결된 기 아이라. 아베가 법적으로 잘못했다 캐야한다. 우리는 정부에서 생활비도 주고, 아프면 병원비도 대준다. 그거 고맙다고 내 안카나. 근데 우리는 돈이 필요해가 카는게 아이라고. 아베가 사죄하고, 일본아들 교과서 고치고...내 마음은 돈이 문제가 아이다. 민간인이 이런 짓을 했겠나. 일본 천황이 전쟁치르면서 군인들 사기위해서 남의 집 귀한 딸을 희생시킨기다 이건. 왕이 죽고 없으니 아베가 우리 조상들 잘못했다고 해야된다. 정부끼리 이래놓고 타결됐다 이게 말이 안된다."

할머니는 차관과의 대화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안 멈출끼다. 차관 설명은 무시할끼다. 말도 안되는 그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 쟈들 이제껏 한 번도 온 적 없다. 그래놓고 지들 맘대로 한기라. 어안이 벙벙하다 아이가. 머시가 타결됐다는 말이고. 누가 해결했다 카드노. 한마디 말도 없도 즈그들끼리 속닥속닥했는데. 우리가 지금 수십년을 외치고 있다 아이가.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고. 보상이 아이고. 쟈들도 귀머거리나 장님이 아니니깐 보고 들었을 꺼 아이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우리 말은 전적으로 무시한기라. 즈그 언니나 형제라도 캐고 그따우 소리가 나오겠나는 말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끼다. 이래가지고는 안된다. 여도 사진만 찍어가시지 마시고 우리 저거를 홍보를 좀 해줘야된다....인제 (입장설명)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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